(미술(예술)/목격과 기록과 생각

소리(지도)와 빈 종이

hasangpaullim 2024. 3. 25. 00:26

이 플로어맵*을 집어들었을 때는 두께감이 있는 중량의 종이를 사용한 것이라 생각했다. 밖에 비해 어두운 전시장과 특수한 헤드폰에 신경을 빼앗긴 탓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빈 종이 한 장이 겹쳐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프린터가 종이 더미를 제대로 된 낱장으로 나누지 못 한 채 인쇄했을 것이다. 하나의 전시가 관객과 작업을 이어주는 인터페이스라면, 플로어맵들 사이에 빈 종이 한 장이 밀착돼 끼어 있는 상황은 일종의 기계적 오류라고 여길 수 있었다.

다행히 이 오류는 전시와 제법 잘 어울렸다. 이 플로어맵은 ‘소리(Sound)’의 ‘지도(Map)’라는 애초에 불충분한 정보값을 지니는 (최소한의 시각정보만을 제공하는) 인쇄물이었다. ‘소리지도’ 뒤에 착 붙어있던 낱장의 공백은 이 지도의 불충분한 성질과 더불어 소리의 성질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소리가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토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빈 종이 한 장으로부터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비물질/물질은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으며, 어느 하나를 강조할 때 불가피하게 구분하여 언급할 수 있을 뿐이겠다.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전시장을 대략 훑어보고 나가려 했던 나를, 오류로 인해 발생한 공백이 붙잡아주었다. 한 공백으로서의 물질이 오히려 어떤 공백을 메워준 셈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참을 살펴보고 듣다가 이제 됐다싶어 나왔다. 다음 전시장으로 들어서며 들고 있던 종이를 접어두려했을 때, 공교롭게도 ‘소리지도’와 겹쳐 들고 있던 빈 종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실화).

* 권병준 〈오묘한 진리의 숲〉 소리지도, 《올해의 작가상 2023》(2023.10.20.~2024.03.3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