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예술)/공부 메모

단초+

hasangpaullim 2022. 7. 15. 18:49

인간은 평생을 배우는 존재다. 이 짧은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관용적 표현으로 느껴지거나, 누군가에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나는 평생을 배운다는 말에 공감한다. 배움이 어떤 특정한 시기의 학습과정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배우다’라는 동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다. (2) 새로운 기술을 익히다. (3) 남의 행동, 태도를 본받아 따르다. (4) 경험하여 알게 되다. (5) 습관이나 습성이 몸에 붙다. 이 중 (4)에 초점을 맞추면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상황에서 배움의 기회와 마주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인식하는 한 배움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다만 이때 경험을 통한 앎은 이를 어떤 자세로 맞이하는지에 따라 기존의 경험과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가치 있는 배움이 될 수도 있고 단지 하나의 개별적인 정보에 머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와 같은 맥락에서 ‘교육’은 경험하여 알게 사실을 가치 있는 요소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존 듀이가 말하는 ‘하나의 경험’에 이르는 탐색의 과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리하면, 인간은 평생 무언가를 경험하며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앎을 보다 가치 있게 하는 교육적 전환을 통해 자신의 삶에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배움을 얻는다. 그런데 ‘인간은 평생 배우는 존재’라는 주장은 ‘인간은 평생 불완전한 존재’라는 전제와 함께 한다. 완전한 존재라면 더 이상 경험을 통해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완전성은 증명하기 어려운 반면,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근거는 역사에서 수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이 평생을 배운다는 관점과 불완전하다는 전제는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교수자가 학습자를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행위를 말한다.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선형적인 양상으로 흐르며 진행된다. 동시대 교육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상호작용성을 비롯해 학습자의 자율성, 주체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며, 교수자의 역할은 원조자(helper) 또는 촉진자(facilitator)로 제한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수자가 없는 학습도 가능하다. 그런데 교수자 중심 교육과 학습자 중심 교육은 얼핏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는 듯이 보이지만 양자 모두 학습자의 배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각자의 출발 방향은 다를지 모르나 먼 길을 돌아서 결국 학습자의 배움과 성장이라는 공동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때 인간이 평생 배운다는 관점과 불완전한 존재라는 전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교수자는 학습자를 목적지로 인도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경험하며 배우는 존재이다. 교육 안에서 학습자의 배움 뿐만 아니라 교수자의 배움에 주목하고 이를 규명할 수 있다면 교육 행위를 보다 다층적으로 바라보고 이로부터 확장된 교육의 선순환적 가치와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그의 저서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을 통해 교육 행위 안에서 교수자와 학습자가 이르는 지적 해방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논의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크 랑시에르는 조제프 자코토의 사례를 들며 더 우월한 지능은 없다고 말한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조제프 자코토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만나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번역판을 읽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지적 혁명을 경험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를 통해 스승 역시 학생보다 우월하지 않고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고 역설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한 학생에게 연결되는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지능’이 동일한 것일 때 그것을 ‘바보 만들기’라고 말하는 반면, 학생의 고유한 지능을 쓰게 하여 그 학생이 스스로를 해방한다면 스승은 자신도 모르는 것을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학생의 고유한 지능을 쓰게 한다는 교수자의 역할은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것을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은 교육 행위가 학습자의 배움을 목적으로 한다는 관점을 넘어선다. 이는 교수자가 학습자를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배우는 존재라는 뜻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교육 행위를 통해 교수자와 학습자가 비선형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은 어느 한 쪽의 의지와 지능만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제프 자코토의 사례 역시 흔치 않은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진 우연적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무지한 스승’과 ‘스스로 해방하는 학생’의 관계가 특정한 학문 분야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반면 교수자가 가르치며 동시에 배우고, 학습자는 고유한 지능을 발견하여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환경과 분야도 있을 것이다. 예술 교육의 영역은 이러한 복합적인 교육의 가능성이 열린 분야다.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의 『학교 안의 미술 학교 밖의 미술』은 예술, 그 중 미술 교육에서 교수자가 배우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는 본 저서를 통해 “미술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로 미술 교육의 역사부터 자신의 경험에 이르는 근거를 제시하며 나름의 결론을 낸다. [1] 이는 미술 교육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로 보이기도 하나, 그는 그 근거로 미술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애매하고 어려운 일인지 토로하는 다양한 일화들을 열거하며 반성적인 자세로 미술 교육에 접근하려는 듯 보인다. [2]

 

미술 교육은 중세 길드의 하위 조직이었던 워크숍에서 그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고, 156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세워진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cademia del Disegno)는 오늘날 미술대학의 시조로서, 미술에 대한 인식이 수공예적인 것에서 인문학적인 것으로 변화한 사회상이 반영된 제도적 움직임이었다.[3] 아카데미는 이상적인 규범을 따르는 방향으로 전형화 하였고, 18세기 말에 이르러 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 운동과 연관된 새로운 교육적 관점이 나타났다. 이 관점은 지금의 미술 교육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기에 동의하는 교사는 완전한 기준을 의심하고, 개인의 독립성과 독창성을 인정했다.[4]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컨템퍼러리에 이르며 미술은 그 자체의 순수한 매체성을 실험하는 영역에서부터 사회의 문화, 경제, 정치, 역사 등이 교차하는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변화하며 교육의 방식도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미술의 이러한 상황과 앞서 설명한 제임스 엘킨스의 입장은 연관성을 갖는다. 미술을 가르치는 방식에 절대적인 답이 있고, 미술을 당연히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술의 다각적인 측면을 모두 다루기 불가능하기에 교수자와 학습자 간에 어긋남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임스 엘킨스는 이 어긋남을 전제로 할 때 미술 교육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입장에 서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수자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을지라도, 동시에 배움의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교수자가 자신의 신념과 가설에 따라 수업을 구성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바탕에 교수자 자신이 무지할 가능성과 학습자의 고유한 지성에 대한 신뢰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미술은 동시대에 이르면서 점점 더 명확하게 불완전성을 띠어 왔다. 미술의 이러한 특수성은 미술 교육에 있어서 교수자와 학습자의 의지와는 별개로 둘의 관계를 스스로 재설정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교수자는 가르치는 동시에 학습자와 같이 배우는 가능성을 마주한다.

 

미술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교수자, 학습자 간 비선형적 교육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면, 예술에 대한 존 듀이(John Dewey)의 접근법은 그 교육의 실현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존 듀이에 따르면 예술은 가르치는 일을 그 무엇보다 잘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이 풍부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에서 의사소통을 통한 교육이라 말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문자에 의존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일반적인 교육을 뜻하지 않으며,[5] 교육 혹은 창작의 결과물로서 예술품, 향유와 소비의 대상으로서 예술과도 거리가 멀다. 존 듀이가 지칭하는 잘 가르치는 예술이라 함은, 예술적 경험을 통해 예술과 경험의 관계를 순환론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예술을 뜻한다. 존 듀이는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가정에 의문을 품으며 전통철학이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경험의 성격’에 주목하였는데, 경험의 성격을 밝히고 이원론의 함정에 빠진 전통철학을 재구성하려는 그의 기획에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6]

 

글의 서두에서 살펴본 인간은 불완전하며 평생 배우는 존재라는 가설, 그리고 미술 교육의 불가능성에서 역설적으로 비선형의 교육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설은 존 듀이가 말하는 경험으로서 예술과 동일 선상에 놓을 때 공명한다. 특정한 규범과 선형적인 교육 방식이 성립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교수자와 학습자가 모두 가르침과 배움을 성취할 방법은 예술적 경험 자체의 교육적 속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학습자는 “경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의 등장과 발견”을 통해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태 속으로 저절로 걸어 들어가”[7]보고, 교수자는 학습자의 예술적 경험에 함께 몰입하는 한편 이를 평가하거나 사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그 경험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이는 교수자가 예술을 매개로 하여 학습자를 가르치는 방식과 다르다. 교수자가 학습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지 않으면서 양자 모두 예술적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에 가깝다.

 

미술을 비롯한 예술의 교육 경험 안에서 교수자의 배움은 그 당사자가 작가(예술가)일 때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예술가는 예술적 경험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이기에 미술(예술) 교육의 모호함과 예술적 경험의 교육적 속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학습자의 예술적 경험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사태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만약 예술가로서 교육자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울 잠재력을 가진 존재라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예술과 교육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의 삶 속에서 예술적 경험을 통해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을 체화 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교육 활동을 통해 학습자와 함께 배우는 과정은 교육자로서 ‘예술가’의 창작 세계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교육자이자 예술가인 한 사람의 창작 세계를 교육 활동과 겹쳐보고 탐구하여 그 상관성을 밝혀낼 수 있다면 예술의 교육적 가치와 그 선순환적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1. 미술을 가르친다는 생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다. 우리가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 미술을 가르친다는 기획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테크닉 교습 이상의 무엇을 하고 있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3. 미술을 가르치는 방식에 기본적인 커리큘럼의 변화를 제안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

4. 미술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제임스 엘킨스, 장호연 옮김, 『학교 안의 미술 학교 밖의 미술』, 책세상, 2006, pp. 325-328.

 

[2] “미술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사실은 교사들을 정진하게끔 이끄는 경향이 있다. 교사들은 이 점에 자극을 받아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게 된다 ......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미술 강사가 이런 모순의 중심에서 일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제임스 엘킨스, 위의 책, p. 167.

 

[3] 김영나, 「르네상스 미술가와 미술교육: 워크숍에서 아카데미로」, 『미술사논단』, 제2권, 한국미술연구소, 1995, pp. 84-86.

 

[4] 제임스 엘킨스, 장호연 옮김, 『학교 안의 미술 학교 밖의 미술』, 책세상, 2006, pp. 50-55.

 

[5] 존 듀이, 박철홍 옮김, 『경험으로서 예술』(2), 나남, 2016, pp. 274-275.

 

[6] 존 듀이, 위의 책, pp. 285-286.

 

[7] 존 듀이, 박철홍 옮김, 『경험으로서 예술』(1), 나남, 2016, p. 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