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6 14

2025년 3월 1일

하나의 공간에서 열리고 닫히는 수많은 전시를 당연히 각각 개별적인 관점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로 상정하고 봐야겠지만, 공간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 왔기 때문에 종종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 다른 전시들을 연결하고 전시와 관객 사이에 개입한다.*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구정아ㅡ오도라마 시티》(2024.12.20.~2025.3.23.)*2024년 아르코미술관 × 온큐레이팅 협력 주제기획전 《인투 더 리듬: 스코어로부터 접촉지대로》(2024.9.26.~11.3.)

2025년 2월 8일

정정엽 작가의 를 보고 깊이 공감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작업실을 만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작업’이라면 각종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제도/기관과 작가가 함께 하는 ‘작업’일 수 있다. 여기에서 범주를 더 넓히면 각종 예술지원제도 역시 제도/기관과 예술인이 협력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겠다. 이 ’공동의 (예술)작업‘이 수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으려면 각 주체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2025년 1월 11일

(인스타 추천으로 뜬 스레드 글 = 스레드 안 보는 이유…)예술지원제도는 간척지 같은 것 아닌가. 기존의 땅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활동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원래 발 디딜 수 없던 곳에 새롭게 만든 땅이 예술지원제도 같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땅 위에서 무언가 할 때 내 발밑의 땅 아래에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 않나. 간척지 위에서 바다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간척으로부터 잃어버린 것들을 잊고, 또 그 대가로 얻은 새로운 땅의 당연하지 않은 소중함도 잊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척지라는 땅은 원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2024년 12월 22일

검사 출신 윤석열 씨는 법의 형식성과 보편성이 갖는 맹점을 악용한다. 눈을 가린 유스티티아의 모습에서 공명정대함을 발견하기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동시에 죄의 책임을 모면할 기회만 찾고 있다.각자 인내심의 끝이 어딘지 강제로 알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유스티티아의 머리 옆에 새로 돋아난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 듯하다. 이 얼굴은 눈가리개를 벗어던졌다.

2024년 12월 20일

일이 있어서 팟캐스트 ‘말하는 미술’의 어느 에피소드를 들었다가 다른 몇몇 에피소드들도 들어보고 있다. 2015년 4월에 첫 에피소드가 올라왔으니 거의 10년 전 콘텐츠이고 사람들 목소리는 생생하다. 예전에 들었을 때는 애초에 생방송 라디오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생생한 목소리’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렇게 들리는 것 같다. 화면을 보지 않거나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이해도 못할 일에 오랜기간 몰두한 사람들 목소리를 듣다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좀 편해지기도 한다. (권병준 작가님 목소리가 좋으심.) 요즘 유튜브 실시간 뉴스와 실시간이라는 이름을 단 뉴스 리플레이를 가릴 것 없이 너무 많이 봐서 스트레스가 쌓여있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