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의 앞면은 자연스레 그 뒷면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추측하도록 관객을 이끈다. 추측으로 이끄는, 혹은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현재의 앞면이 과거의 뒷면이었고, 현재의 뒷면은 과거의 앞면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작업실에서 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면이 지금의 뒷면이고, 바닥을 향해 있던 면은 지금의 앞면이었을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의 앞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 뒷면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게 한다면, 그림의 윗면과 아랫면은 뒷면에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할 수 있게 돕는다. 이때 좌우 측면 역시 위아래 면과 거의 같은 역할을 한다.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면 모두 과거 작업실에서는 천장 혹은 바닥을 바라봤거나 아직은 정체가 모호한 어떤 동일한 가능태로 존재했을 것이다. 위 네 면을 통칭하여 ‘옆면들’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번 전시에서 여러 갈래로 나타나는 듯한 작가의 ‘왜’들은 가상의 프레임과 실제 프레임, 그림의 면면 간 관계 속에서의 ’왜‘라는 질문과 그 대답일 수 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언젠가 만약 ‘왜’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으로서 옆면들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 등장한다면, 이때 관객은 작가가 뒷면에서 벌인 일의 원인과 동기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을까. 또, 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 어려운 혹은 구분이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이 그림은 어디에서부터 추측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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