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예술)

전시장에서의 영상과 의자

hasangpaullim 2024. 2. 8. 01:01

최근 어느 전시에서 본 작업은 30분이 넘는 결코 짧지 않은 길이의 영상이었고, 그 앞에 놓인 의자는 전시를 위해 제작된 육면체의 나무 스툴이었다. 전시장의 모니터/스크린 앞에는 스툴 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약간의 불만은 잠시 접어두고 두 귀를 무선 헤드폰으로 덮은 채 흘러가는 영상을 지켜봤다.

전시를 보고 돌아오면서 해당 영상 작업 자체보다 그 앞에 놓여 있어서 내 엉덩이를 대고 앉았던 물체에 관해 더 생각해봤다. 등받이 없이 제작된 딱딱하고 속이 꽤 비어있는 나무 의자. 작가에 의해 치밀하게 의도된 결과인지, 전시 준비 중 타협의 과정을 거쳐 누군가가 임의로 만든 것인지, 별 의도 없이 으레 그렇듯 익숙한 모양새로 놓이게 되었는지, 또는 이 외에 내가 생각치 못 한 어떤 이유로 작업의 앞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2020년 어느 작가의 개인전 작업은 4시간 가량 되는, 보통 인간의 집중력 지속 시간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긴 영상이었다. 그 영상 앞에 놓인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등받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작업)에 아주 약간의 불만조차 생기지 않았었는데, 작가가 해당 영상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보라고 내놓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2022년 한 비엔날레에서 접한 어느 작가의 작업은 커다란 쿠션에 파묻혀 누워서 보는 영상이었다. 이는 영상 매체가 지닌 특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업은 아닌 듯했고, 퍼포먼스의 연습 과정에 집중하면서 영상으로 그 무드를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의 몸을 지지해주는 방식을 비롯한 전시/관람 형식이 영상의 분위기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고 느꼈다. 부끄럽지만 깜빡 졸음이 몰려왔을 정도였다.

바로 앞서 말한 두 작업의 관람 사례는 단순히 대충 봐도 문제 없어서 쿨하고 좋았다거나, 누워서 볼 수 있으니 편해서 좋았다는 차원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상/화면과 관객의 신체가 상호 관계 맺는(끊는) 방식을 중요하게 (그렇지만 각자 다른 방향으로) 고려한 영상 작업을 말하기 위해 그러한 작업을 가까운 기억에서 끄집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굴리던 중 퇴근길 회사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등받이 없는 발열 벤치(뻐정 엉뜨 의자)를 마주했다. 한겨울 야외에서의 영상 작업을 전시하는 상황에서 등받이 없는 발열 의자는, 실내 전시장에서의 스툴과는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