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암흑의 영상, 소리와 움직임

hasangpaullim 2024. 2. 18. 00:29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늘 찍은 사진을 살펴보다가 벽지 벗겨내는 작업이 끝날 무렵 1시간 2초 동안 내 주머니 속에서 우연히 촬영된 영상을 발견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는 순간이 담긴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 암흑인 화면이었다. 보이는 형상은 없으나 소리가 흥미로웠는지 운전 중이던 바로 옆 사람이 서울로 가는 동안 켜놓자고 제안했다. 듣다보니 어제 유튜브에서 본 20년차 미장 전문가의 미장 ASMR 영상이 생각났다. 시청자가 미장 소리로부터 심리적 안정을 받을 수 있다면, 작업 당사자는 그 소리로부터 흙손질을 비롯한 아주 구체적인 움직임의 형상을 자동반사적으로 떠올릴 것 같았다.

나는 불과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횟수의 벽지 제거 경험을 했을 뿐이지만 암흑의 영상이 내는 소리로부터 당시 내 몸의 움직임과 그 공간에서 벌어진 상황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내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소리가 짧고 빠른 호흡으로도, 길고 느린 호흡으로도 가장 크게 들렸다. 중경과 원경에서 누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말을 하는지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고, 누군가는 근경에 잠시 등장했다가 다시 원경으로 멀어지기도 했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나와 너, 우리의 신체 발화를 소리만으로 복기해보는 경험이었다. 이 소리가 차 안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와 섞이면서 과거의 움직임은 더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때로는 현재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흐려지기도 했다. 온통 소리와 암흑으로 가득한 이 영상에 밝은 빛과 함께 방 문의 일부가 드러나자,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 즈음 차는 이미 서울에 진입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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