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예술)

이동하는, 일시적으로 멈춘 작품

hasangpaullim 2024. 3. 13. 11:50

예전에 모 미술관 수장고에서 근무할 때—엄밀히 말하면 수장고 소속(?)이 아니라 소장품자료관리과 소속 소장작품 관리 파트로 근무한 것이지만— 당시 미술계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대규모 수증 작품을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문제로 인해, 해당 컬렉션을 비롯해 미술관 내 수많은 소장작품을 임시 보관 장소에서 수장고로, 수장고에서 다른 수장고로, 수장고에서 임시 보관소로 수차례 이동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조각, 회화, 뉴미디어 등 여러 장르로 분류되는 다양한 조건의 작품을 이리저리 이동하며 보낸 시간은 각 작품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종종 독립적인 존재처럼 언급되지만, 실상 전시장에 놓이는 작품은 종종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정보와 당연한 한 쌍처럼 함께 놓이면서 작가로부터 독립하지 못 한다. 그런데 어딘가로 이동하는 작품은 전시(장) 혹은 작가와 맺은 관계 안에서 존재하기보다는 그 크기, 무게, 재질, 경도, 구성, 수량 등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술관 내 비교적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의 작품은 전시장에 도착해 선보여지기 위해 멈출 때와는 사뭇 달랐고, 수장고에 도착하여 보관되기 위해 멈출 때와도 달랐다.

이동하는 작품은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기에 이동을 위한 일시적 멈춤 상태로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어울렸다. 이동을 전제로 한 일시적 멈춤의 상태는 작품과 이동 경로의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다. 앞서 말한 작품의 크기, 무게, 재질, 경도, 구성, 수량과 같은 조건에 따라 그것을 수레에 실을지 핸들러들이 손수 들지 결정했으며, 이동하는 길의 천장 높이, 통로의 폭, 출입구와 엘레베이터의 크기, 경사로 기울기, 수레 크기 등의 조건에 따라 정확히 어떻게 얼마나 싣고 들지 결정했다.

고정된 위치와 멈춘 상태를 전제로 결정된 작품의 기존 상하, 좌우, 전후는 이동하는 과정에서 뒤섞였다. (사람 형상을 하고 선 대형 목조각의 경우)머리를 바닥의 완충제에 기대고 가로로 길게 눕거나, 구조상 지지대에 해당하는 부분이 외려 다른 무엇에 의해 지지 받거나, 해체된 각 부위가 서로 다른 수레에 실려가는 등 작품들은 일시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멈추어 이동했다. 이 모습은 마치 이동하는 작품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작가가 만들어 부여하고 전시가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자신들의 길고 먼 생애 중 일부이자 일시적인 상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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