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예술)

(메모) 내가 아는 누군가는 모르는 공간과 사물에 대해

hasangpaullim 2023. 3. 8. 00:00

조르주 페렉은 『공간의 종류들』에서 글을 쓸 때의 종이 페이지를 하나의 공간으로 묘사한다. 페렉은 공간의 범위를 점점 확장해가면서 침대, 방, 아파트, 문, 계단, 벽, 도시, 나라 등을 비롯해 그 밖의 곳, 그 이상의 공간으로까지 나아간다. 종이의 페이지를 공간으로 상정하는 것이 지금은 아주 새롭거나 특별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페렉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과 세계를 공간으로 인식하는 지속적인 관찰과 분류, 생각에 기반한 글을 썼기 때문에 페이지를 공간으로 보는 관점은 어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 속에 있었을 것이고, 비유보다는 경험 그 자체를 표현한 것에 가까웠을 듯하다.
 
무언가로 채워진 페이지가 모여 만들어진 책 역시 하나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텐데, 사람은 자신이 앉은(혹은 서있거나 누운) 자리에서부터 책 속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책 속으로 도망친 사람은 반드시 책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한다. 책에 매몰되는 일은 종종 좋지 못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도망쳐 들어갔다가 유유히 나오거나, 유유히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공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공간 안에서 산다. 이때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은 매우 한정된 공간에 머문다. 물론 죽어서도 타의에 의해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할 수는 있겠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이동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의해 이동권을 제한 당하는 사람이 느낄 감정을 상상해본다.) 
 
B는 여느 노인들처럼 거동이 불편해 좁은 반경의 공간에서 생활했다. 서울과 광주, 또는 서울과 부산의 중간쯤 위치한 어느 광역시의 외곽 동네에 살던 B가 가장 오래 머물던 공간은 꽤 오래된 낡은 주택이었다. 이 주택이 있는 동네는 이곳에 사는 사람,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만이 오가는 그런 동네였다. 노년의 B는 주로 그 주택에 속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며 살았다. 때로는 그 주택이 속한 동네의 공간 이곳 저곳을 오가기도 했다. 이제는 더이상 이동할 수 없이 매우 한정적인 공간에 머물게 된 B이지만, 과거에 그는 분명 그 동네와 주택에서, 그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며 살았다.
 
서울에서만 평생을 살고 있는 A가 B의 주택에 방문하는 상상을 한다. A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그 공간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지역, 그 동네, 그 주택에 방문한다. A는 이 상황을 통해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의 주인공들이 프랑스의 파리라는 공간에서 튀니지의 스팍스라는 공간으로 이주한 상황을 떠올린다. A는 결국 도망쳐 나와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A는 그 지역, 그 동네, 그 주택에 결코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들의 사이 사이를 이동한 이상 그 곳들에 머물러 있는 사물들과 마주할 것이다. 가령 심하게 포장되어 있는 그림들, 200살이 훌쩍 넘은 거대한 느티나무, 낮게 흐르는 개천 너머 높게 공사 중인 아파트, 두 가지 과거와 각각 같고 다른 색으로 활짝 만개한 (움직이기 어려운) 키네틱 조형물 같은 사물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