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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환, 〈이름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말하는 머리들》 중)

미술관의 빈틈을 건드리는 반가운 작업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빈틈’은, 당연히 정돈되어 있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거의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장소다. 편지지에 적힌 이름 “아버지의 마음-담양”을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하면, 액자로 표구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기본 정보 외 아무런 설명 없는 사진 작품이 나온다. 아마 전시된 적 없는 사진이어서 표구를 하지 않았을 듯하다. 이어서 강봉규라는 작가 이름을 검색하면, 작품설명 없는 수많은 사진들과 함께 2016년 하반기에 열린 ’기증작가초대전‘에 관한 정보가 나온다. 작가의 미술관 소장작품들은 ‘2017-’로 시작하는 관리번호를 달고 있다. 이 번호는 전시가 열린 다음 연도인 2017년을 뜻한다. 작가의 사진들은 이때 소장품..

미술 창작 레지던시 관련 메모

(2022.10.26. 메모)창제작+레지던시+오픈콜.예술가에게 호의적이고 열린 기회처럼 보이는 말의 조합이다. ‘예술인의 창제작과 생활에 관심을 갖고 열린 기회를 제공’하는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는 이 말들의 조합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저 기만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실은 셋 중에 하나라도 충족되면 감사할 지경이다. 불행히도(?) 많은 예술인들은 셋 중에 하나만 충족되어도 감사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셋 중 아무 것에도 관심 없어 보이는 레지던시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걸까? 실제로 ‘창제작+레지던시+오픈콜’은 예술인 보다는 ‘사업’의 수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당사자인 예술인은 더이상 감사해 할 수 없다.(2025.6.30. 메모)공공 미술 창작 레지던시가 여전히 유효하려면, ‘작가의 실..

(미술(예술) 2025.07.02

《flop: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 메모(2023.8.6. 메모)

본격 스포츠 전시일 것만 같은 《flop: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소마미술관)을 놓칠 수 없어서 끝나기 직전에 보고 왔다. 외국 사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스포츠에 관한 전시를 볼 기회는 흔치 않은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본격 스포츠 전시는 잭슨 홍 작가의 개인전 《13 Balls》(2012~2013년, 아트클럽1563) 정도다. 올해 초에 제목만 보고 기대하며 찾아 간 전시 《너클볼》(갤러리조선), 《칩 슛》(카다로그)은 전시와 작품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스포츠 용어를 그저 제목에 비유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다. 다행히 기대한 것처럼 《flop: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은 스포츠에 관한 전시였다. 정면 돌파가 아닌 측면 돌파의 방식이었다.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

서혜연 《Skin palette—bone and seed》(오온, 2025.6.4.~6.22.)

전시 첫 날.계단 위에서 맨 아래층을 향해 늘어진 얇은 사슬에 몇 개의 얼음덩이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았다. 천천히 녹으면서 하나둘 물방울로 떨어져 내린 얼음덩이 일부가 계단 아래 물웅덩이에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저화질의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볼 수 있었던 이 광경은 오래 가지 않아서 송출이 중단되었다(이후 다시 라이브 방송이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햇빛 좋은 6월 초, 차갑게 동그란 고체가 미지근하게 넓은 액체로 변해 갔을 것이란 추정만 남겨둔 채 시간은 흘렀다.전시 마지막 날.내려가기 위한 계단으로 들어서자 눈 아래에 비석처럼 서 있는 투명한 초록빛의 형상이 보인다. 각양각색의 덩이, 면, 선이 투명한 액체 속에서 공기와 엉키면서 고정된 형체가 되어 있다. 그 뒤 구석에 거미 한..

지도 속 인사미술공간

2025년 6월 12일. 카카오맵에 ‘인사미술공간’을 검색하면 마을버스 정류장인 ‘인사미술공간.세탁소’만 나올 뿐이다. 이제 창덕궁길 89(원서동 90번지)에 주소 말고 다른 이름은 없다. 주로 사용하는 앱이라 즐겨찾기 등록을 해둔 덕에 내 지도에는 인사미술공간이 여전히 있긴 하다. 네이버지도, 구글맵에는 아직 모든 사람에게 인사미술공간이 있다. 하지만 인사미술공간은 언젠가는 그 누구의 지도에도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 누구의 사진첩 속에도 없을 것이고, 또 언젠가는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없을 것이다.

(미술(예술) 2025.06.12

어느 미술 아카이브의 의자(였던 의자)들

2005년 관훈동 시절 처음으로 인미공 아카이브를 조성할 당시 의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가구가 제작됐다. 의자는 생김새도 다양하고 개수도 많았지만, 현재에는 아르코미술관 아카이브의 언저리 어딘가에 (아마도) 단 3개의 의자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사라진 의자들은 아마 낡거나 망가졌다는 이유로 처분됐을 텐데, 이들은 기관의 ’자산‘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행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리 어렵지 않게 처분됐을 것이다. 만약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면 보다 더 많은 의자들이 여전히 미술관 또는 인미공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인미공 아카이브’에 놓여있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더 이상 앉아볼 수 없이 사라진 의자들은 지금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까. 과연 ‘존재’이기는 할까. 남아있는 ..

(미술(예술) 2025.06.06

‘최종본’으로만 이루어진 어느 미술 아카이브(?)에 관한 메모

‘아카이빙‘, ’연구‘, ’창조적 활용‘은 모두 중요한 말이다. 다만, 이 말에는 무엇을/왜/어떻게/(누가)/(언제)/(어디에서) 아카이빙하고 연구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할지에 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무결/무해한 ‘말’은 비로소 비집고 들어갈 ‘빈틈’으로서 아카이브가 될 수 있다. 빈틈이 없이 말로 말끔히 정의된 아카이브는 평온하다. 평온한 아카이브에서는 담당자, 생산자, 사용자를 비롯한 모든 관련자도 함께 평온하다.이 아카이브는 ‘최종본’들로만 이루어진 아카이브다. 최종본으로만 이루어졌기에 그 최종본의 빈틈을 알 수조차 없다. 그래서 최종본은 말그대로 “수정 따위를 하여 고친 가장 마지막의 책이나 문서”로 평온하게 존재할 수 있고, 이 최종본들의 집합으로서 아카이브는 무결/무해한 언어로 단정히..

(미술(예술) 2025.05.27

공간 운영 종료에 관한 메모

그간 문화예술계에서 계약직 근로자로 몇몇 곳에서 일했다. 아르코 산하 인사미술공간을 비롯해, 서울문화재단의 모 창작 공간, 모 소규모 전시 공간, 그리고 모 국공립 미술관 두 곳. 이 중 미술관 두 곳을 제외하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공간’들은 대부분 운영 종료됐거나 종료될 예정이다.공간의 운영 종료는 그곳에서 전시를 비롯한 창작 활동을 펼쳤던 작가와 기획자들에게 작지 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단지 아카이빙, 홈페이지 등 기록이 소실되는 차원의 아쉬움이 아니다. 홈페이지, 기록물 등이 사후적으로 성실히 관리된다 하더라도,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사라지거나 크게 변화하면 그 공간을 통해서 과거의 활동을 상상적으로 기억할(될) 수 있는 여지가 소실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아쉬움은 작가, 기획자 등 예술..

(미술(예술) 2025.05.22

망각되고 반복되는 것들

정책연구나 방향 설정 토론회 자료집 같은 과거의 문서들을 시기별로 쭉 살펴보면, 그 흐름이 어떤 유사한 문제의식의 망각과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멀리 거슬러 갈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이 문서는 용역 연구를 통해 2020년 발행된 정책연구서의 출력본이고, 그 위의 형광펜과 빨간펜 흔적은 2023년 12월 13일의 어느 회의 준비를 위해 긋고 쓴 것들이다. 조금은 친절한 마음으로 긋기 시작한 형광펜이 분노의 빨간펜으로 바뀌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또 시간이 흘러 2025년이다. 무엇이 어떻게 망각되고 반복되고 있나.

(미술(예술) 2025.05.15

김익현 《사진 전》

이 장소(시청각)의 마지막 전날 14시간 7분 동안만 어둡게 열리는 사진 전(前)의 시공. 작가에게 내가 기억하거나 상상한 사진의 전과 후에 관해 이야기하면 어두운색 봉투를 하나 건네받을 수 있다. 이 봉투 안에는 인화지가 담겨 있다. 인화지의 앞/뒤에는 사진의 전/후가 담겨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 인화지의 앞/뒤 모두 사진 후(後)가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또 언젠가 이 사진 후는 어디에선가 누군가에게 사진 전의 시공으로 다시 열릴 수도 있겠다.